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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작성자
본청/문화예술과(-)
작성일
2009년 6월 4일(Thu) 00:00:00
조회수
2179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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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3.jpg 이미지


1831(순조31) ∼ 1863(철종14). 조선 제25대왕. 재위 1849 ∼ 1863.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로 전계대원군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6월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비 김조순의딸)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군으로서, 1844년(헌종10) 회평군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앙의식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음으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 (철종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이 되어 국구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하였는데, 이듬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냥을 진대하게 하였고 또 그해 여름에 한재가 심하자 재곡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깝게 여겨 재용의 절약과 탐욕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약 1,000호에 달하는 여주의 민가에 은자와 단목을 내려주어 구휼하게 하였고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양을 지급하였으며, 이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조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구호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이 때문에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토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마침내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이라는 일시 특별기구를 설치하고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료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를 벗어나 제대로 정치를 펴나갈 수 없었다.

이와 같은 현상에서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여 사상운동을 전개, 확산시키자 이를 탄압, 교주 최제우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을 씌워 처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에 33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천한전에 봉안되었으며,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 하나가 있어 금릉위 박영호에게 출가하였을 뿐 후가가 없었다.

1864년(고종1) 4월 7일 경기도 고양의 희릉 오른편 언덕에 예장되고 능호를 예릉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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