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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작성자
본청/문화예술과(-)
작성일
2009년 6월 4일(Thu) 00:00:00
조회수
2013
첨부파일


1168(의종220 ∼ 1241(고종28). 고려의 문신. 재상. 본관은 황려. 호는 백운거사(백운). 만년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선생이라고 불렀다 한다.

호부시랑을 지낸 윤수의 아들이다. 9세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하였고 문체가 뛰어남을 보였다. 14세때 사학의 하나인 성명재의 하과(여름철에 절을 빌려 과거준비를 위한 공부)에서 시를 빨리지어 선배 문사로부터 기재라 불렸으며 장래가 촉망되었다. 이때 그의 희망은 장차 문학직을 맡아 문명을 날려 크게 입신출세 하는 것이었다.

지엽적 형식주위에 젖은 과시의 글(과거지문)같은 것은 하찮은 소인배들이 배우는 일로서 멸시하였고, 그가 사마시에 연속 낙방한 큰 요인의 하나는 이러한 데에 있었다. 16세부터 4∼5년간 자유분방하게 지냈으며 기성문인들인 강좌칠현과 기맥이 상통하여 그 사회에 출입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오세재를 가장 존경하여 그 인간성에 깊은 공감과 동종을 느끼곤 하였다. 1189년(명종19) 유공권이 좌수가 되어 실시한 사마시에 네 번째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임유가 지공거. 이지명이 동지공거가 되어 실시한 예부시에서 동진사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곧 관직에 나가지는 못하게 되자 25세 되던해 개경의 천마산에 들어가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장자의 무하유지향(세상의 번거로움이 없는 허무지연의 악사)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하였다. 백운거사라는 호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 라고 한다. 26세(1193)에 개경에 돌아와 지난 시절과는 달리 빈궁에 쪼들리게 되었고, 수년래의 무관자의 처지를 한탄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왕정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관기의 문란, 사회상의 피폐, 그리고 10여년래의 남부지방의 농민 폭동 등은 그의 사회.국가의식을 크게 촉발하였으며, 이때에 (동명왕편).(개원천보영사시) 등을 지었다. 혜문. 총수좌. 전이지. 박환고. 윤세유 등과는 특별히 가까운 사이였다. 1197년 조영인. 임유. 최선 등 최충헌 정권의 요직자들에게 구관의 서신을 썼다. 거기에서는 그동안 진출이 막혔던 문사들이 적지 않게 등용된 반면 그는 어릴 때부터 문학에 조예를 쌓아왔음에도 30세에 이르기까지 불우하게 있음을 통탄하고 일개 지방관리로라도 취관시켜줄 것을 진정하였다. 이 갈망은 32세때 최충헌의 초청시회에서 그를 국가적인 대공로자로서 칭송시를 읊고 나서 비로소 이루워 졌다.

사록겸장서기로서 전주목에 부임하였으나 봉록 액수가 적고 행정잡무가 번거로우며 상관이나 부하는 태만하고 동료는 그를 중상하는 등 그 생활이 고통스럽게 느껴졌고 또 동료의 비방에 의해 1년 4개월만에 면관되었다. 그는 처음 자조를 하다가 다음은 체념하고 결국 타율적으로 규제 받는 것을 숙명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202년 동경과 청도 운문산 일대의 농민폭동 진압군의 수제원으로 자원종군 하였다.
현에서는 각종 재초제문과 격문. 그리고 상광에의 건의문 등을 썼다. 1년 3개월만에 귀청 하였을 때는 행상 될 것을 은근히 기대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좌절감을 맛보게된 그는 물필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해 자부심이 컸었던 터에 도리어 실망과 모멸감을 맛보았다.

1207년(희종3) 이인로. 이공로. 이윤보. 김양경. 김군수 등과 겨루었던 모정기가 최충헌을 대단히 만족하게 하여 직한림에 권보 되었다. 그리하여 문필을 통한 양명과 관위상의 현달이 일체적일 가능성에 대하여 다시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1215년 드디어 우정언(종8품) 지제고로서 참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출세에 있어서 동료문사들과 보조를 같이 하게 되었고 쾌적한 문관생활을 만끽하게 되었다. 금의를 두수로 하여 유승단. 이인로. 진화. 유충기. 민광균. 그리고 김양경 등과 문풍의 성황을 구가한 것은 이즈음의 일이다. 1217년(고종4) 2월 우사간이 되자 출세의 순조로움에 숙망이 차차 충족되는 것 같았고 관리로서의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 가을 최충헌의 한 논단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하는 부하의 무고로 인하여 정직당하고 그 3개월 뒤에는 좌사간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집무상 과오를 범한 것으로 단정, 좌사간마져 면직되었다. 이러한 돌변사태는 그때까지 전통적인 왕조적 규범에 의하여 직무를 수행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태도를 관리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그에게 큰 충격과 교훈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관념이 최충헌의 권력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파탄되어버리자 또 다시 사고와 태도를 바꾸어 보신에 특별히 마음을 두게 되었다. 1219년 최이의 각별한 후견 덕분으로 중벌은 면하게 되어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로 부임하였다. 만 1년간의 재임중 박봉인데다 직장환경은 열악하고 민의 생활모습은 추하고, 참혹하여 불쾌감을 일으키는 등 이곳으로부터 일각이라도 빨리 달아나고 싶었다.

중앙에서의 풍족하고 쾌적하던 문관 생활이 그립기만 하였다. 그는 경륜가가 못됨을 자처한 셈이다. 다음해 최충헌의 사망에 따라 집권한 최이에 의하여 귀경하게 된 이규보는 이제 최이에 의하여 절대적 공순 관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일체의 주견을 가잠이 없이 다만 문필기예의 소유자로서 최씨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집행하는 것, 그것만이 택할 길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뒤 만 10년간은 최씨집권의 흥융기이기도 하였거니와 그가 고관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진 기간이기도 하다. 보문각대제지제고. 태복소경. 장작감. 한림학사시강학사. 국자제주 등을 차례로 역임한 뒤 1228년 중산대부판위위사에 이르렀고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230년 한 사건에 휘말려 문죄 되어 위도에 유적 되었다. 그는 이때까지 권력에 심신을 다 맡겨왔던 터였는데 자기를 배제하는 엄연한 별개의 힘으로 존재하는 사실에 새롭게 놀랐다. 보신을 잘 못하는 자신이 부덕한 사람으로 통감되었다. 8개월만에 위도에서 풀려나아 이해 9월부터 산관으로 있으면서 몽고에 대한 국서의 작성을 전담하였는데 국서는 최씨의 정권보전 책으로 강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고 이규보는 이 정책에 적극 참여한 셈이다. 65세때 판비서성사보문각학사경성부우첨사지제고로 복직되었고, 1237년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감수국사판예부사한림원사태자대보로서 치사함에 이르러 그는 문관으로서의 생애가 훌륭하게 완결되었음을 자인하고 승리감에 잠긴다. 이로써 자손들은 그의 음덕으로 장차 사회적 위치가 높아질 것이며, 관운에 혜택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71세이후 하천단. 이수 및 승통 수기와 깊이 사귀었고 최씨의 문객인 김창. 이인식. 박훤과도 교제가 잦았다. 만년의 그는 몸의 허약함과 반록의 두절 뒤에 불편을 느꼈으나 이 점은 최이의 특별한 가호를 받았다.

또한 몽고의 침략에 대하여 괴로워하였으나 결국 불평 이상의 것이 못되었다. 몸져 누워있는 그에게 감격적이었던 것은 관리로서 기본목적은 달성이 된 셈이었다. 최이에 바쳐진 그의 시들이 최이의 은의에 대하여 충심에서 감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문한의 관직자이며 양심적이나 소심한 사람이었다. 학식은 풍부하나 그 작품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나타낸 자기표현은 아니었으며 그때그때 의식에 떠오르는 바가 그대로 표출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근 본질상 입신출세 주의자이며, 보신주의자였다. 그가 이러한 사람이 된 근본이유는 그의 가문을 올려세우고 그의 고유의 문명을 크게 떨치고자 하는 명예심에서 였다. 그러나 이규보는 최씨정권하에서 일반 문한직 관리중의 한 전형이었다고 할 것이다. 문한집으로는 (동구이상국집)이 있다. 시호는 문순이다.

백운 이규보 선생은 고려 중기 무인정권 밑에서 한 자루의 붓으로 무자경국대업이 신며에 산분이다. 선생은 려천이씨시상 은백의 후손으로 의종 22년 (1168)에 부윤수공과 모 김해김씨 사이에 태어나 고종28년 몽고의난에 천도한 이곳 강화도에서 74세로 돌아가니 나라에서는 문순공의 시호를 내렸다.

선생은 명종20년(1190) 진사에 합격한 후 고종 24년(1237) 문하시인으로서 동경 이상국집 56권과 백운소설 등 많은 저서를 통하여 고려 시대의 문장을 가름할 위대한 업적을 남긴분이다. 선생의 문장을 일컬어 동 시대의 진화는 적선의 일기가 안가밖에 서있는 것같다고 하였다. 최자는 일명과같아서 감히 칭찬할 수 가 없다. 천재의 준일한 자라고 평하였으니 선생은 실로 현세의 문자라고 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분이다.

선생은 자호로 백운거사 백운 삼흑호선생 상상헌 등 다양하게 일컬었으니 품성이 소탈하고 청백한 분이었다. 선생은 유불선 삼교에 출입하고 기고문이 많으니 전통적인 신념에도 유념하여 구삼국사에 의거하여 동며왕편의 작서 서사시를 남겨 만유를 엄유하는 기상을 가졌다. 선생의 문집에 2천여수의시와 가사가 남아 있으나 생전에 7,8천 여수에 이르는 시사를 지었다고 하니 선생은 참으로 천하의 시인이었다. 행운류수와 같이 막히는데 없이 뻗어 나가는 시사는 한림별전에 이정언 진한림 상운주필로 이름을 날리고 백운시를 경각에 짓기도 하였다.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몽고의 정복 야욕이 고려에 미쳤을 때 선생은 그 예봉을 한자루의 붓으로 멈추게 한 일이 있었는가 하면 이나라 국보로서 세계문화사에 찬연히 빛나는 해인시 짓기도 하고 삼정례문의 에서는 주자를 사용하여 이 책이 간행된 사실을 명백히 밝힘으로서 세계 최초의 고자주성을 알려주었다. 또 당시 나라의 중요한 외교문서는 선생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로써 문자는 칼보다 강하는 말은 선생에게 합당한 말이니 고려 수백만 백성 위에 선생이 보여준 천재의 일기는 이 나라 문기의 역사에 길이 빛날 교감이 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는 정부보조와 지방비를 들여 선생의 묘역을 정비하고 항몽의 고장 강화에서 문자에 살고 문자로 생을 마친 선생의 유덕을 기리니 이 또한 뜻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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