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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

작성자
본청/문화예술과(-)
작성일
2009년 6월 4일(Thu) 00:00:00
조회수
1947
첨부파일

이건창2.jpg 이미지

이건창3.jpg 이미지


1852(철종3) ∼ 1898. 조선 말기의 문신. 대문장가. 본관은 전주. 소명은 송열. 자는 봉조. 호는 영재. 이조판서 시원의 손자로 증이조참판 상학의 아들이다.

할아버지가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 유수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나 선대부터 강화에서 살아오던 토박이다. 할아버지로부터 충의와 문학을 바탕으로한 가학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5세때에 이미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장성한 뒤에는 모든 공사 생활에서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강위. 김택영. 황현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용모가 청수하였으며, 천성이 강직하여 부정.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 하지 않고 친척. 친구나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하였다. 일반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의례적인 의식이나 양보가 없이 소신대로 피력하는 성격임으로 인심 포섭에는 도리어 결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정사를 처리하는 관청에서 지나친 충간과 냉철 일변도의 자세는 벼슬길에 많은 장애요인으로 되기도 하였다.

1866년(고종3) 15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나라에서도 너무 일찍 등과 하였기 때문에 19세에 이르러서야 홍문관 직에 벼슬을 주었다.

1874년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청나라에 가서 그곳의 황각. 장가양. 서부 등과 교류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암행어사가 되어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행을 낱낱이 들쳐 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벽동으로 유배되었고 1년이 지나서 풀려났다.

공사에 성의를 다하다가 도리어 당국자의 미움을 사 귀양까지 갔으며 그 뒤 벼슬에 뜻을 두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이 친서로 "내가 그대를 잘 알고 있으니 전과 같이 하여달라"는 간곡한 부름에 못 이겨 1880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는가 하면 흉년을 당한 농민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구휼에 힘썼다.

한편 세금을 감면하여 주기도 하여 백성들로부터 환심을 얻어 그의 불망비가 각처에 세워졌다. 그 뒤 어버이 상을 당하여 6년간 집상을 마치고 1890년 한성부 소윤이 되었다.

당시 나라안에 거류하는 청국인과 일본인들이 우리 백성들의 가옥이나 토지를 마구 사들여 방관하는 사이에 그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그들이 소유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문제를 일으킬 것에 대비 시급히 국법을 마련하여 국민들의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팔아 넘기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실시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때 우리나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홍장의 부하인 청국공사 당소의가 한성소윤의 상소내용을 알고 화가나서 공한으로 "청국사람과의 가옥이나 토지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조치를 하려는가"라고 항의하였다. 이에 그는 "우리가 우리 국민에게 금지시키는 것인데 조약이 무슨 상관인가:라고 일축하였다.

그러자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하여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금지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않고 만약 외국인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다른 죄목으로써 문죄하고 가중처벌을 하였음으로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백성들은 감히 외국과 매매를 못하게 되니 청국인들도 하는 수 없이 매수계획을 포기하게 되었다. 1891년 승지가 되고 다음해 상소사건으로 보성에 재차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서 1893년 함흥부의 난민을 다스리기 위하여 안핵사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관찰사의 죄상을 명백하게 가려내어 파면시켰다.

임금도 지방관을 보낼 때에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가게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공사를 집행하는 그의 자세는 완강하고 당당하였다. 갑오경장 이후로는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 특진관 등이 제수 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896년 해주 관찰사에 제수 되었으나 극구 사양하다가 마침내 고군산도로 세 번째 유배되었다가 특지로 2개월이 지난 뒤에 풀려났다. 그 뒤 향리인 강화 사골(사기리)로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2년 뒤에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 (당의통락)은 파당을 초월하고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원래 그의 문필은 송대의 대가인 증공. 왕안석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정제두가 양명학의 지행합일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의 학문태도를 교훈받고 실천하였다. 한말의 대문장가요 대시인인 김택영이 우리 나라 역대의 문장가를 추승할 때에 여한구대가라 하여 아홉사람을 선정하면서 그 최후의 사람으로 이건창을 꼽은 것을 보면 당대의 문장가라기 보다 우리나라 전대를 통하여 몇 안되는 대문장가의 한 사람임에 손색이 없을 듯하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성품이 매우 곧아 병인양요 때에 강화에서 자결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개화를 뿌리치고 철저한 척양척왜주의자로 일관하였다.

저서로는 (명미당집). (당의 통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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