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집선생 (1606-1637)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설서, 이조정랑, 부교리에 이어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과의 화의를 반대하여 중국 심양으로 잡혀가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척화의 소신을 주장하다 피살되었다. 세상에서는 오달재,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로 불리우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선생이 살던 집의 건물은 없어지고 밭으로 변했으며 대리석으로 된 비석만 전하고 있다. 비석 전면에는 충신고학사 윤집택지라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