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의 묘소이다. 묘는 단분(單墳)이며 특별한 장식이나 석조물이 없다. 이건창은 어렸을 때부터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이시원으로부터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배웠다. 5살 때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해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874년(고종 11)에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았던 서장관에 발탁되었다. 그 후 충청도·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민생구휼을 위해 노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인 강화에 내려와 살다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건창의 성품은 매우 곧아 병인양요 때에 순절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었으며, 문필은 송대(宋代)의 문장가인 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문태도를 실천하였다. 한말의 대문장가인 김택영이 뽑은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에 포함 될 정도로 문장에 특출하였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당의통략』 등이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