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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기행 - 산 그리고 나들길

작성자
김태웅
작성일
2018년 2월 25일(Sun) 09:40:36
조회수
489
블로그 URL
https://blog.naver.com/twkimjan/221180280906
우리나라에서 다섯번째로 큰 섬 강화도는 민족의 성산 마니산과, 강화의 진산 고려산·진강산·길상산 등의 저산성 산지도 발달했으며, 산지 사이로는 비교적 넓고 기름진 평지가 마련되어 있어 섬이되 섬으로 느껴지지 않는 곳이 강화이다.

강화도는 여전히 우리나라의 첫손 꼽히는 성지이다. 강화도는 삼국시대 때부터 주목받아왔다.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으로 해전과 육전의 요충지였고, 고구려는 일찍이 이곳에 '혈구군'을 설치하였다. 중국과 해상·육상 통로가 없었던 신라 역시 자주 이곳을 넘봤다. 누가 한강 유역을 먼저 확보하느냐가 삼국간의 최대 관건이었다.

고려시대를 맞아 또 다른 역사적 국면이 전개된다. 몽골병의 잦은 침략을 피해 고종은 서울에서 가까운 섬 강화로 천도(1232)를 감행, 줄기찬 저항으로 39년간의 장기전을 치른다. 그 아픈 시련을 불력(佛力)에 의지해 팔만대장경을 주조, 민족혼으로 승화시킨 것은 여간 자랑스런 일이 아니다. 당시의 고려궁터가 강화읍 관청리에 남아 있다.

조선 인조는 1626년 강화를 유수부로 승격시킨다. 이듬해 정묘호란을 겪으며 인조는 이곳으로 피난했고, 후금과의 강화도 조약을 이곳에서 맺는다. 그러나 병자호란(1636)을 당해 강화는 완전 함락되고 마는 오욕의 역사를 겪는다. 효종은 나라를 잃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한을 씻고자 북벌계획을 추진하면서 이곳에 진(鎭)과 보(堡)를 설치했다. 군사력 강화는 이후 숙종 때까지 추진되어 12진·보와 53돈대, 9포대가 축조·설치되었다. 이 중 현재 복원되었거나 상태가 양호한 전적지는 스물여덟 곳이다.

한강·예성강·임진강의 3대 하천 어귀에 있으면서 서울의 관문이었던 강화는 이러한 수난에 대항하면서 상처투성이의 땅이 되었다. 한국사의 축소판인 것이다. 이 지역에 형성된 문화재 역시 저항 속에서 일구고 승화시킨 것이어서 귀하고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 충렬왕 때 인천(당시는 인주)에 병합되었다가 우왕 3년(1377)에 강화부로 승격되었는데, 21세기의 문턱인 1995년 1월 강화는 다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강화는 대개 아픈 역사의 흔적 때문에 오늘날의 관광지가 되었지만, 강화는 여전히 강화이고 강인한 긍지의 땅이다.

1906년. 강화 선비 화남 고재형(1846∼1916)은 세상사 시름 내려놓고자 섬 순례를 시작한다. 환갑의 화남은 섬을 돌며 보고 들은 감상을 7언 절구 한시로 남긴다. 그 256수가 화남의'심도 기행'이라는 기행문집으로 전해 내려온다. ‘심도(沁島)’는 강화의 옛 이름이다. 한 세기가 흘러 2008년. 강화도 시민연대는'심도 기행'에 적힌 여정에 따라 걷기 여행을 시작한다. 강화나들길의 첫걸음이다.
길동무와 함께하는 강화의 산과 강화나들길을 영상에 담아 본다.

성명 : 김태웅
주소 : 서울시 강서구 화곡로 14길 9 3층(화곡동)
전화 : 010-3382-9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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