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섬, 축복의 땅 강화도에 기독교 역사기념관이 세워졌다. 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군. 그 중심에 복음의 이야기가 있다. 고려 때 몽고 침략, 조선시대 프랑스와의 병인양요, 미국과의 신미양요.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거치면서 아픔을 겪은 강화인들은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1893년 성령의 두 빛줄기 성공회와 감리교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성공회는 강화의 관문인 동쪽 갑곶이에 첫 선교사 워너를 통해 성니콜라회당을 만들어 고아들을 모아 선교를 시작했고, 감리교는 강화의 서쪽 시루미에 인천내리교회 존스 선교사가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배 위에서 세례를 베푼 것이 첫 선교의 시작이다.

이후 성공회는 통제영학당 교관인 코웰 대위와 커티스 부관이 살던 동문안 영국 해군 교관 관사를 구입하고 이전하여 선교본부를 구성하고 교세를 확장해 갔다. 감리교는 시루미 이승훈 가족과 초시 김상임이 개종하면서 자신의 집에 첫 감리교회인 교항(현 강화교산)교회를 설립하고, 이어 두 번째 교회인 홍의교회를 통해 고부, 건평, 흥천교회가 생겼으며 삼산면, 교동면, 서도면으로 복음이 확장되었다. 1900년에 잠두(현 강화중앙)교회가 강화읍에 설립되고, 잠두교회 성도 이동휘 권사를 중심으로 마을마다 학교를 세워 민족운동과 육영사업을 시작했다.
한편 동문 안으로 선교본부를 이전한 성공회는 1900년 12월 강화읍 성당을 건축하고 신학교와 수도원을 설립했다. 어린이들에게 축구를 처음 가르쳤으며, 선교지역을 온수리 지역으로 확대해가며 교육, 의료선교를 하여 온수리, 내리, 넙성리, 사기리, 여차리, 초지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강화는 감리교와 성공회뿐 아니라 성결교, 장로교, 침례교, 순복음 교회 등이 각 마을에 세워져 210여 개의 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활동을 하고 있다.
특별히 기억할 것은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강화 마리산의 기도운동이다. 1915년부터 1960년대까지 성령의 바람이 강화에 불어와 그 복음이 황해도 해주, 김포까지 번져나갔다. 성령 운동은 항일 운동과 함께 연결되어 강화에서 3ㆍ1운동 당시 1만 명이 참여했다. 현재 선조의 숭고한 신앙을 이어받아 강화도의 교회는 내외적 성장을 거듭해 왔으며, 강화 출신의 수많은 영적 지도자가 국내외 각지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