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0년대
940년 3월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명칭을 제정하여 강화현으로 됨.
1000년대
1018년
강화현에 현령(縣令)을 둠
1034년 9월 기유
박술희를 갑곶으로 귀양보내자 왕규(王規)가 죽임
1034년
왕규를 갑곶으로 귀양보냄.
1100년대
1101년 2월
남경유수, 강화현령 등의 외관록(外官祿)을 제정함.
1172년
교동에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둠.
1197년 9월
태자 숙(璹)을 강화로 추방함.
1200년대
1210년 12월
태자 숙을 강화에서 소환하고 이름을 정(貞)으로 고침.
1211년 12월 계묘
최충헌이 왕(희종 ; 熙宗)을 폐위시켜 강화현으로 보냈다가 자연도로 유배.
1215년 8월 기해
최충헌이 전 임금(희종)을 교동현으로 데려옴.
1227년 3월 을묘
최우가 전 임금(희종)을 교동으로 옮김.
1232년 6월 을축
최우가 고종을 위협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김.
1232년 6월 병인
최우가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강화에 궁궐을 지음.
1232년 7월 을유
고종이 개경을 떠나 강화에 도착함.
1232년 11월
강화에서 몽골 황제에게 진정표를 보냄.
1232년
강화군으로 승격하고, 강도(江都)라 칭함.
1232년
세조·태조의 재궁(梓宮)을 강화로 이장함.
1234년 1월 계해
여러 도의 장정을 동원하여 궁궐과 관청을 건축함.
1234년 2월 계미
봉은사에서 연등회를 거행.(이후 거의 매년 거행)
1234년 3월
대궐 남쪽에 불이 나 수천여 호(戶)가 소실됨.
1235년 7월 임오
광주와 남경의 사람들을 강화에 들어오도록 함.
1235년 11월 계유
법왕사에서 팔관회를 거행.(이후 거의 매년 거행)
1235년 12월
강화 연안의 제안(堤岸)을 증축함.
1237년 8월
강화 외성을 쌓음.
1237년 10월 정유
정종(貞宗)의 묘호를 희종으로 고치고 석릉에 장사지냄.
1238년 4월
몽골의 조서를 제포관에서 맞이함.
1241년 9월
이규보가 강화에서 죽음, 동국이상국집 간행.
1242년 4월 병진
고종이 곤릉에 참배함.
1243년 7월
흥국사를 지음.
1243년 8월 경오
세조와 태조의 묘를 강화 개골동으로 이장함.
1244년 8월
강안전을 개축함.
1245년 3월
강화 견자산 북쪽 800여 호에 불이 남.
1246년 5월 기사
왕이 선원사에 행차함.
1248년 10월
개경에 나가 있던 문무양반 모두를 강화에 돌어오게 함.
1250년 1월
승천부 임해원 옛터에 궁궐을 짓기 시작함.
1250년 6월 경자
신안공(新安公) 전(佺)을 시켜 몽골사신을 강도에서 맞이함.
1250년 8월
최우의 초상을 선원사로 옮김.
1250년 8월 경신
강화 중성을 쌓음.
1250년 12월 기미
몽골 사신 홍고이(洪高伊)를 제포궁에서 맞이함.
1251년 2월 무술
고종이 본 대궐로 이거함.
1251년 3월 을축
고종이 본 대궐에서 화엄신중도량을 베품.
1251년 8월 갑오
새로 지은 화산동 국자감(國子監)에 공자의 초상을 둠.
1251년 9월 임오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장경판당에 행ㄹ차함.
1251년 11월 을사
몽골사신 장곤(將困)·홍고이 등 40명이 승천관에 도착함.
1252년 5월
승천부의 성곽과 낭무를 축조함.
1253년 5월 병신
몽골 사신을 제포궁에서 맞이함.
1253년 8월 무신
갑곶강에서 수전(水戰)을 연습함.
1253년 9월 계사
몽골 기병이 갑곶강 건너편에서 노략질을 함.
1253년 11월 신묘
고종이 승천부에서 몽골 사신을 만남.
1254년 8월 기축
제포궁에서 몽골 사신을 대접함.
1254년 12월 신묘
신묘(神廟)에서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냄.
1255년 1월 신축
몽골군이 갑곶강 건너편에 침입함.
1255년 8월 무자
몽골군이 승천부에 들어와 서울에 계엄령을 내림.
1256년 3월 무오
몽골군이 착량 밖에 도착함.
1257년 7월 무오
제포에서 몽골군을 위해 연회를 베품.
1257년 9월 계유
고종이 제포관에서 몽골 사신을 영접함.
1257년 3월 병자
유경(柳璥)·김인준(金仁俊) 등이 최의를 죽임.
1258년 8월 기해
고종이 제포관에서 차라대(車羅大)의 출륙을 논의함.
1258년 9월 경오
몽골군이 착량으로부터 갑곶강 건너편에 와서 진을 침.
1258년 10월 임인
고종이 친히 백좌도량을 베품.
1259년 2월 갑오
마니산 남쪽에 별궁을 창건함.
1259년 4월 정유
삼랑성 신니동에 임시 대궐을 짓도록 명령함.
1259년 6월 계미
강화 내성을 헐기 시작함.
1259년 6월 임인
고종이 유경의 관저에서 서거함. 묘호를 고종, 능호를 홍릉이라 함.
1259년 9월 기미
고종을 홍릉에 장사 지냄.
1261년 9월 임술
원종이 승천부에 행차함.
1261년 9월 정해
원종이 홍릉에 참배함.
1264년 5월
참성단에 제사지내고 신니동에 가궐을 지음.
1264년 5월 계묘
삼랑성 가궐에서 대불정오성도량을 4개월간 베품.
1264년 6월 경술
마니산 참성단에서 기도를 올림.
1264년 6월 신해
원종이 신니동 가궐에서 대불정오성도량을 베품.
1264년 6월 임자
원종이 혈구사에서 대일왕도량을 베품.
1270년 5월 임술
재상 회의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결정하고 방을 붙여 공고함.
1270년 5월 갑자
상장군 정자여를 강화에 보내 삼별초를 타이르게 함.
1270년 5월 무진
장군 김지저(金之底)를 보내어 강화에 있는 삼별초를 해산케 함.
1270년 6월 기사
배중손·노영희 등이 삼별초를 이끌고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옹립하여 항쟁을 시작함.
1270년 6월 신사
김방경을 역적 추토사(追討使)로 임명함.
1270년 8월 무인
몽골군이 강화성 안 백성의 집을 방화함.
1270년 9월 무오
다루가치가 강화성 안의 정형을 상세히 살핌.
1271년 8월
몽골황제가 끌려갔던 강화의 백성들을 풀어준다고 공문을 보냄.
1272년 9월 병인
원의 다루가치 이익(李益)이 강화의 군비 정형을 염탐함.
1276년 9월 갑진
강화의 재궁을 창릉과 현릉에 이장함.
1277년 5월 임진
승려 육연(六然)이 강화에서 유리 기와를 구움.
1287년 9월
강화 민가에서 은 50근을 수색하여 탈취함.
1290년 2월
합단(哈丹)의 침입으로 홍자번(洪子藩) 등이 강화 환도를 건의함.
1290년 8월 경인
적을 피해 강화로 옮길 계책을 세움.
1290년 10월 무술
강화로 노약자를 옮김.
1290년 11월 갑진
국사(國史)와 보문각(寶文閣)·비서시(秘書寺)의 책을 강화로 옮김.
1290년 11월 무신
궁인들을 강화로 대피시킴.
1290년 11월 경술
태조의 소상(塑像)을 강화로 옮김.
1290년 12월 정해
충렬왕이 합단의 병란을 피해 강화 선원사에 머무름.
1291년 4월 임오
충렬왕이 남도(藍島)에 갔다가 다시 선원사로 돌아옴.
1291년 4월 기축
충렬왕이 개경에 갔다가 선원사로 돌아옴.
1291년 5월 기유
충렬왕과 공주가 장봉(長峰)에 갔다가 선원사로 돌아옴.
1291년 6월 정묘
왕이 개경에 갔다가 강화로 돌아옴.
1291년 9월 무신
왕이 개경으로 돌아감.
1292년 1월 정사
선원사에 역대 실록을 옮김.
1300년대
1314년 윤3월 경오
선원사에서 세자 감(鑑)의 명복을 빔.
1317년 3월 계미
원의 사신이 강화 군기 등을 검열함.
1351년 10월 임오
충정왕이 공민왕에 양위하고 강화로 쫓겨남.
1352년 3월 신해
강화에 있던 충정왕이 독살됨.
1352년 3월 계축
포왜사 김휘남(金暉南)이 교동으로 퇴각함.
1352년 3월 경신
왜적이 교동의 창고에 방화함.
1357년 4월 무자
왜적이 교동에 침입함.
1357년 윤9월
왜적이 교동에 침입함.
1358년 4월
왜적이 교동을 침범하여 경성에 계엄을 내림.
1359년 1월 기해
교동방어지휘사에 유방계(柳方癸)를 임명함.
1360년 윤5월 병진
왜적이 강화에 침입하여 선원·용장사를 약탈하자, 심몽룡(沈夢龍)이 맞서 싸우다 순절함.
1360년 윤5월 계유
왜적이 교동현에 불을 지름.
1362년 8월 기유
강화 용장사를 수축함.
1363년 4월 기미
왜적의 배 213척이 교동에 정박함.
1365년 3월 경신
왜적이 교동과 강화를 침범함.
1365년 4월 기해
왜적이 교동과 강화를 침범함.
1366년 5월
왜적이 교동을 침범함.
1367년 3월 기축
왜적이 강화부를 침범하여 약탈함.
1373년 3월
왜적이 강화부를 침범함.
1373년 7월 을사
강화만호 하을지(河乙池)를 왜적을 방어하지 못한 이유로 강등시켜 유배보냄.
1376년 7월
왜적의 침입으로 교동의 백성을 피난시킴.
1376년 10월
왜적이 강화에 침범하여 전선(戰船)을 불태움.
1377년
강화부로 승격됨.
1377년 3월
판삼사사 최영(崔塋)이 강화방수군을 조직함.
1377년 5월 경인
왜적이 강화부에 침범함.
1377년 5월 정유
왜적이 강화부를 침범하여 대대적으로 약탈함.
1377년 6월
강화 등지에서 왜적에게 참살 당한 시체를 수습하도록 전포(錢布)를 내림.
1385년 11월
강화만호 문천주(文天柱)를 유배 보냄.
1387년 1월
왜적이 강화에 침범하여 최영이 해풍에 주둔하여 방어함.
1388년 6월
우왕을 강화로 내쫓음.
1389년 11월
이성계가 창왕(昌王)을 강화로 내쫓고 공양왕을 세움.
1389년 12월 무신
유구를 강화에 보내 창왕을 죽임.
1390년
양광도의 강화·교동 등지를 경기우도에 소속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