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으로 제작된 이 수조는 바리(鉢)형태를 띠고 있고, 구연부에는 덧띠를 두르고 있으며 약간의 균열과 파손 흔적이 보이지만 모두 수리하여 양호한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수조(水槽)는 삼국시대부터 큰 돌 내부를 파서 물을 담아 쓰기 시작하였으며 우물가에 두고 그릇 등을 씻을 때 사용하였다. 수조(水槽)는 궁궐에서는 드무라 부르는데 솥같이 생긴 그 안에 물을 채워 화재가 날 경우 바로 사용할 수 있고, 공중에 떠다니는 화마(火魔)나 불귀신이 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다른 귀신이 이미 와 있다고 착각하게 해서, 다른 곳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설치한다는 설화가 있다. 현재까지 명문(銘文)이나 청동수조 제작과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정확한 제작 연대를 밝힐 수 없지만 고려 말 내지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청동수조의 용도나, 재질과 규모 및 제련과 제조 기술에 대한 제반 여건을 가정할 때 혼란기의 여말선초 시기로 비정하기 보다는 좀 더 난숙한 귀족문화가 꽃을 피우던 고려 중기로 시대를 소급해 보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비슷한 유물의 사례 연구를 통하여 정확한 주조 시대와 용도를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신대현,『전등사』한국의 명찰 시리즈 1, 대한불교진흥원, 2009. 김형우·안귀숙·이숙희,『인천의 전통사찰과 불교미술』1,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11. 문화재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