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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여행과 카메라 가방 (강화도 용흥궁 이병현 해설사님과 함께 일하시는 분들께)
-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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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 작성일
- 2018년 1월 22일(Mon) 22:23:03
- 조회수
- 3821
강화도 여행과 카메라 가방
-이 글은 강화도 용흥궁 이병현 해설사님과 함께 일하시는 분들께 드립니다.-
“이번 겨울 방학에는 어딜갈까?”
매년 두 번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간다. 겨울, 여름방학에 가는 가족여행이다. 아들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시작한 가족 행사이다. 소소한 기억들과 추억들이 이제는 제법 쌓여서 나름 여행자의 뿌듯함이 우리 가족에게는 있다.
기차를 타러 가야하는데 민방위 시간에 딱 걸려서 전력질주를 한 기억도 있고 음식 맛을 못 잊어서 다음 해에 다시 찾은 곳도 있고 자전거 트래킹으로 3박4일을 돈 여행지도 있다. 겨울 여행은 대부분 역사유적지를 중심으로 다녔고 여름에는 해수욕이 즐거운 곳으로 다녔다.
몇 박 몇 일 가던 것을 대폭 줄여서 올 겨울 여행은 단촐한 하루여행으로 계획하였다.
“강화가자!”
의견은 어렵지 않게 모아졌다. 강화는 어릴 때부터 자주 가던 곳이었는데도 아이들은 강화를 선택하였다. 하루여행지로는 그만한 곳이 없기도 하니 가족들의 만장일치는 어렵지 않았다.
딸아이의 바람은 강화 시내의 동서남북 문을 모두 가보는 것이었다. 아들아이는 철종의 생가를 가보고 싶어 했다. 남편은 고려궁지 옆에 있는 한옥 성당을 가고 저녁에는 전등사에서 일몰을 보고 싶어 했다. 의견을 모아보니 아기자기한 여행그림이 나왔다.
14일 카메라를 들고 강화도로 향했다.
매일 출근도 하고 외출도 하며 집을 나서지만 여행자로 문밖을 나서는 발걸음은 왜 그렇게 다른지! 여행은 평범한 일상의 우리를 순식간에 리셋한다. 우리는 조금 더 설레여 하고 조금 더 유쾌해지고 조금 더 힘차 진다. 여행자의 길 위에서는 그렇게 된다.
여행자가 된 우리 가족은 한겨울이지만 로이킴의 ‘봄봄봄’을 들으며 서울을 벗어나 자유로를 탔다. 겨울하늘을 밀치고 나온 태양은 붉었고 한 시간 남짓 걸려 강화에 도착했다.
고려궁지로 먼저 갔다. 고려궁지를 갈 때마다 느낀다. 볼 것 없다 치면 정말 볼 것 없지만 보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다고. 몽골을 피해 강화로 온 고려왕실과 무신정권이 누렸다는 그 호화로움을 우리는 이야기했다. 강화에서 번성했던 고려청자와 강화에서 이룩한 팔만대장경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몽골은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었지, 아무말 대잔치처럼 추측하며 고려궁지를 돌아 나왔다. 너무 고려이야기만 해서 조선 시대 건립된 외규장각이 서운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곱게 저축하기로 했다.
고려궁지에서 나오니 성당에서 예배를 보고 나오는 분들과 마주쳤다. 우리는 그 분들 사이를 지나 성공회 한옥 성당으로 갔다. 따뜻한 겨울햇살과 성당의 앞뜰. 그 조화로움 덕분에 우리는 진지하게 이 곳 저 곳을 살폈다. 한옥 성당 내부는 한겨울 찬기가 가득했지만 경건함이 스며있었다. 낮은 나무의자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개화기 당시 천주교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품고 지켜온 선각자들이 떠올랐다. 민주주의 또한 다르지 않아서 종교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피로써 그것을 지켜졌다고 생각하니 일요일 오전, 나의 여유로움 안으로 파릇한 긴장감이 돌았다. 부족하고 느릿한 나의 품성이 오랜만에 자세를 고쳐앉는 듯 했다.
성당 마당에서 강화시내를 바라보았다. 성당과 대칭점을 이루는 아파트 벽화가 가장 눈에 띄었다. 강화의 역사가 새롭게 느껴졌다.
강화 시내가 훤하게 보이는 곳에 자리한 성공회 한옥 성당. 이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성당이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가 어렵지 않게 읽혀졌다. 강화 사람들의 당당함을 느꼈졌다.
강화의 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아이들이 “배고파!” 라며 당당하게 말하자 나도 허기가 몰려왔다.
여행자에게 배고픔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 같다.
매일 출근해서 먹는 점심은 의무적 느낌이 크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 먹지 않으면 일할 수 없다는 의무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의무감 같은 것.
그러나 여행지에서의 한 때는 소중한 권리 같다. 여행지에서의 밥을 먹지 않으면 그곳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하물며 라면이라도 먹어야 여행지는 내 속으로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여행지에서의 한 때는 여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여행을 완성하는 배고픔, 여행자의 권리인 배고픔이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그것을 즐겁게 맞이했다.
“강화에 왔는데 뭐 먹을까?”
우리가 명랑하게 선택한 곳은 서문 김밥집이었다. 일요일 오전 1시간을 기다려서 8줄의 김밥을 샀다. 맛의 비결은 소금이라는 문구가 인상 깊었다. 밥에 당근을 넣는 특징보다 소금이 비결이라는 말에 나는 속으로 수긍을 했다.
소금은 맛이 음식의 맛을 좌우한다고 나 또한 생각한다. 생소금과 구운 소금이 다르고 죽염이 또한 다르며 굵은 소금과 가는 소금이 다르다. 맷돌에서 끝없이 소금이 나와서 바닷물은 짜다는 전래동화와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은 소금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나에게 소금지론이 있고 거기에 1시간의 기다림이 더해졌으니 김밥은 꿀에 가깝게 맛있었다.
든든하게 먹고 우리는 오늘의 사건 현장인 용흥궁으로 향했다.
우리의 동선을 보면 강화에 사시는 분들은 웃을지도 모른다.
길을 건너며 왔다 갔다 하는 걸 무슨 여행이라고 그렇게 신나게 다니니?
할지도 모른다.
그 재미가 여행이죠, 뭐! 라고 웃을 수밖에.
여하간 우리는 길 건너 용흥궁으로 갔다.
강화 도령 철종. 세도정치의 정점에서 살아야 했던 왕.
우리는 딱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용흥궁 마루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으며 한껏 여행의 즐거움에 도취되어갔다. 담 밑 그늘에는 아직도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고 담쟁이는 겨울을 나느라 조용했는데 우리는 즐거웠다.
게다가 용흥궁의 좁은 골목에서 보이는 것들은 소담하고 예뻤다.
조선 말기 비운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했던 왕과 이후 펼쳐질 세계사의 질곡 속에서 조선이 맞이해야 할 격랑을 생각한다면 백치미로 보일만큼 예쁘고 아기자기해 보였다.
골목을 벗어나와 우리는 동문과 서문, 남문을 돌았다. 각 문의 이름을 일고 문 위에는 어떤 동물이 그려져 있나를 보았다. 한발 두발 뛰기 놀이를 하기도 하고 성터를 따라 걸어 오르기도 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먹기도 하고 강화 작은 영화관에 가서 시간이 닿으면 1987 영화를 한 번 더 보자고도 했다. 영화는 이미 모든 좌석이 매진이어서 운동장의 눈만 밟고 돌아섰다.
점심은 청년 창업자들이 운영하는 개벽2333 몰에 가서 먹었다. 나가사끼 짬뽕, 단군버거 등 한 가득 펼쳐놓고 먹으며 이런 사업을 마치 할 사람처럼 진지하고 심도있게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 같은 것이니 재미질 수 밖에!
강화 사시는 분들은 이해할 수 없는 동선, 즉 온 길 되돌아 갔다가 또 온 길 되돌아 가며 우리는 여유있게 강화를 느끼며 다녔다.
오늘따라 사진찍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해주는 아이들 덕분에 남편은 신이 나서 간식을 나르며 셔터를 눌렀다.
북문 겨울바람에서 강화의 호연지기를 느끼며 전등사로 이동할 때는 이미 3시였다. 일몰을 보기에는 어려운 날씨였다. 전등사는 이미 여러 번 갔었던 곳이라 아이들은 익숙함을 넘어 좀 지루해 했다.
기어이 작은 아이는 차에서 좀 잔다며 전등사 둘러보기를 포기했다.
전등사에 들어섰다. 서해의 겨울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었다.
4천 년 전의 흔적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전율해야 하지만 그런 전율감은 느끼지 못하고 전등사 찻집에서 나오는 생강차의 쓴맛에만 전율을 거듭했다.
삼랑성은 꽃피는 봄에 걷자고 남편과 이야기 하며 마시는 세작의 향 덕분에 나도 은은해졌다.
산사의 밤은 고요가 먼저 온다. 겨울은 더 그렇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해질녁은 여행자에게 특별한 시간이다. 떠나왔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과 돌아가 다시 이어갈 일상의 팍팍함과 함께.
해는 지고 길은 멀어도 천개의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을 나는 팍팍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같았다. 4천년의 공간에 와서 내 일상의 찰라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피식거리는 모습이라니.
벗어나지 못한다 한들 품넓은 단군할아버지와 여여한 부처님은 나와 잡은 두 손을 놓치 않으실 거라 여기며 나는 가족들과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 또한 강화만큼이나 멋들어지게 먹고 해안도로를 좀 달리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가져갔던 가방을 풀며 여정을 돌아보는데 그때였다.
카메라 가방이 없었다.
어?
어디서 잃어버렸을까?
아!
두 손으로 얼굴을 부볐다. 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한 때 내 몸의 일부처럼 함께 다녔던 것들이다. 카레라는 다행히 계속 몸에 지니고 다녔던 터라 가지고 왔는데 망원렌즈가 들어있던 카메라 가방을 잃은 것이다. 모두 잃은 것은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 위로에 위로를 얹고 누군가 잘 쓰길, 하며 마음에서 털어냈다.
그래도 내 몸의 일부였었던 것을 잃었는데 생각이 날 수밖에는 없었다.
아! 생각이 날 때마다 두 손이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새어나오는 길고 긴 숨.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여행에서 돌아온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강화군 이변현 해설사입니다. 혹시 카메라를 잃어버리지 않으셨는지. 제가 용흥궁에서 보관중입니다. 연락주세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구나, 놀라웠다.
“제가 가서 찾도록 할게요. 사례드리고 싶습니다.”
통화를 하는 내내 정말 고마워서 찾아가 얼굴을 보고 진심으로 인사를 하고 싶었다.
망원렌즈를 찾았다는 기쁨 이상의 것이 내게 왔기 때문이다.
매일 들었던 사회면 뉴스들로 인해 할퀴어진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차 한잔이라도 절대 사례는 받지 않겠습니다.”
사례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정확했다. 그러면서 택배로 붙여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온몸으로 인사를 거듭하고 가족들에게 카메라 가방과 렌즈를 찾았다는 말을 그 날 저녁에 했다. 가족들의 분위기도 나와 비슷했다.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는 거야.”
“정말 좋은 분들이다, 엄마. 사례도 안 받다니!”
우리는 저녁 내내 밥 먹을 생각도 잊고 고마움과 놀라움의 말을 이어갔다.
세상은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나는 머리까지 맑아져서 잠자리에 누워서도 계속 그분들을 생각했다.
다음 날에도 문자가 왔다.
“우체국 택배로 보냈습니다. 저는 어제 근무중 보관된 가방을 보았고 오늘 보내드렸을 뿐, 일요일날 습득해 가져오신 해설사 분은 다른 분이고 가방에서 성함과 전화번호의 단서를 찾은 분은 또 다른 동료입니다. 그러니 제게 부담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쪼록 이 추억을 통해 강화도가 또 방문하고 싶은 흐뭇한 여행지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쁜 하루되세요.”
강화가 또 방문하고 싶은 여행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까지 가질 수 있었던 나는 문자를 받고 울컥했다. 세상으로부터 위로받는 느낌이었고 ‘괜찮다.’고 쓰다듬어주는 느낌이었다. 내가 과한 느낌에 휩싸였을 수도 있다. 그 분들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일 수 있다. 일터에서 누군가의 놓고 간 물건을 봤고 사무실에 가져다 놨고 찾아가겠지 했는데 소식이 없으니 살펴봤고 연락했고 돌려보냈다. 담담하고 정직한 일상 속에서 그냥 자신의 일을 했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 나는 카메라와 만났다.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보았고 세상을 담아냈다. 내가 할 수 없었던 많은 말들이 무의식을 통해 흘러나왔고 렌즈를 통해 표현되었다. 그때처럼 카메라를 몸에 지니고 다니지는 않지만 카메라를 보면 내 안의 새살이 어떻게 돋아나 내가 되었는지를 간간이 느낀다. 내게 카메라는 소중하다.
소중한 나의 카메라 렌즈를 담담하고 정직한 과정 속에서 찾았다.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았으면서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았으며 살아가는 방식을 다시 배웠다.
강화는 내게 특별해졌다. 친정 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라서 특별했지만 이후에 살아가면서 초점을 잃거나 방향감을 잃었을 때 찾아가야 할 곳이 되었다.
가는 길 생각하리라. 외포리 어디쯤일 수도 있고 동막 어디쯤일 수도 있으며 고려산 어디쯤일 수도 있겠지만 담담하고 정직한 일상을 생각하리라. 돌아오는 길 일몰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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